말씀 : 마가복음 11:1-11
설교 : “무엇에 환호하는가?”
여러분 혹시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메멘토 모리의 유래를 아시나요? 그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중세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옛 로마의 군대가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 때 행렬 뒤에서 큰 소리로 외치던 말이었습니다. 메멘토 모리라고 외친 이유는 “죽음을 기억하라,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장면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은 자기 나라에 돌아와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며 장엄하게 행진하는 반면, 이들을 맞이하는 로마시대의 사람들은 크나큰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을 환영하고 개선하는 황제와 장군의 입성을 그 어느 때보다 축하하고 기뻐하며 소리지르는 두가지 모습이 동시에 존재하는 행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해 보이는 행렬이 오늘 본문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공생애 마지막 사역인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셨습니다. 구원의 십자가를 위한 걸음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맞은편 마을의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 만약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르신대로 가서보니 나귀새끼가 있었고, 풀어 가지고 오려하자 주님 말씀대로 전하였더니 이를 허락하였고, 그렇게 가져온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이는 중세 로마시대 전쟁에서 승리한 왕과 장군이 수 많은 병거와 말들, 군사들을 이끌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기었노라 하는 개선행진의 모습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연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님은 병거와 말이 아닌 구약에 예언된 나귀새끼를 타고 모든 전쟁과 활을 끊으시는 평화와 화평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예언한 구약 스가랴9:9-10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람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며 주님은 우리에게 오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구원을 베풀고 화평을 주실 왕에게 적합하지 아니한 나귀새끼 같으나 이것은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 비천하심과 가난하심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우해 오신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왕이요 구세주이시나 말과 병거를 타고 개선하는 로마황제와 같은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농부의 모습으로 세상의 왕이 누리는 모든 특권과 영광을 벗어 버린 채 가장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는 주님이 전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유함과 겸손과 섬김으로 세워지는 나라이기에 때문입니다. 세상의 왕의 입성이 적군이 죽이고,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 주님의 입성은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자기 몸을 대신 내어주는, 십자가를 대신 지는 크신 사랑으로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승리요. 죄악세상을 단번에 이기시는 놀라운 구원의 승리의 입성인 것입니다. 로마서 6:11절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김을 받기 위한 놀라운 은혜의 입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구약의 말씀을 따라 로마의 지배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킬 민족의 영웅이요, 자신들의 왕으로 예수님이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보고 그 앞에 자신들의 겉옷과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을 폈던 것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은 구약시대 왕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왕되신 주님으로 보긴 하였으나 온 세상에 구원을 베푸실 왕이 아니요 자신들의 왕으로만 여긴 것입니다. 보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긴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 어두움 속에서 그저 주님의 오심만을 환호한 것입니다. 사실상 이 환호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을 위한 것이요. 앞으로 펼쳐질 영광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위한 환호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구원,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환호하며 기뻐하고 큰 소리를 외치는 것이 바로 유대인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구원을 베푸실 왕이시오 평화의 왕으로 그 누구보다 겸손히 섬김의 모습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앞으로 맞이할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예수님 앞에서, 이 사실을 모른채 그저 자신들이 바라던 나라를 생각하며 환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엇갈린 모습으로 예수님의 입성과 사람들의 환호가 함께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된 우리들은 어떠한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미국 에모리대학교의 신약신학 교수이신 프레드 크래독 교수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부활절이 되면 종려주일로 시작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며 다가오는 부활절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종려주일의 축하와 부활절의 축하 속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십자가와 예수님의 수난은 잊어버려 놓치고 지나간다고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부활절을 기다리다 십자가를 생각하기보다 지워버리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종려주일과 부활절을 맞이하며 우리를 위해 오셨고, 다시 사신 기쁨의 환호에만 집중한 나머지 환호와 환호 사이의 십자가 고난은 지키기보다 지워버린채 보내는 오늘날 신앙의 현주소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열비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부활절을 앞두고 과연 무엇에 환호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진실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환호한다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자신들의 나라를 위해 오신 주님을 환호하며 맞이한 것처럼 우리도 동일하게 행하면 안될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영광만을 위해 환호할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생명주신 주님을 위한 감사와 은혜의 환호이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성도로서의 영광이 없음을 생각하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십자가를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분이 지셔야 했던 우리 죄의 깊이와 무게를 생각하며 깊은 회개와 감사로 주님 앞에 서는 저와 열비 성도님들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