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후 감사간증을 해보라는 전도사님의 권유에 선뜻 ‘예’라고 대답은 못했지만
내가 누리는 놀라운 감사는 증거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떨리지만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짧지 않은 내 삶에서 감사한 것이 많이 있지만, 가장 큰 감사는 무엇보다 구원의 은혜입니다.
저는 인품 좋으신 아버지 밑에서 유교적인 집안 분위기 가운데 자랐지만
말씀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목하던 가정에 중학생이던 막내 남동생이 심장에 문제가 생겨 소천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우리 가정에서 유일하게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아휴 하나님!’하면서 갔습니다.
슬픈 시간이 찾아왔고, 죽음이 모두에게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을 깊이하며
이십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가보겠다는 생각은 미쳐하지 못했고,
친구 중에 착한 아이가 교회를 다니고 있어서 나중에 나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교회를 보내야지 하는 마음은 있었습니다.
결혼 후 아이들이 태어나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남편은 어린 시절 교회를 다녔었고, 아버님께서 단신 월남하신 실향민이셨는데,
이북에 계신 할아버님이 장로님이셨습니다.
아마도 내가 먹은 마음으로 교회를 간 것이 아니라, 이북의 할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님을 위해 하신 기도가 응답되어졌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믿음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저에게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작은 딸아이가 어릴 때 심한 기침을 했습니다.
아이의 고통 때문에 마음 아픈 시간을 보내며 몇 년전 죽은 동생이 생각나서 괴로웠습니다.
고통을 나누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가깝게 지내던 목사님께서 동생이 먼저가 있으며 우리를 기다린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제 인생에 기독교 가치관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큰 문제가 해결된 느낌이었습니다.
주님을 알아가며, 교회중심의 생활을 하고 살던 어느 날, 남편에게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벼랑 끝에 서는 순간이 되었고 이제껏 남편과 내가 의지하던 모든 것이
의지할바 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며, 마음속에 그런 순간을 늘 생각해보긴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지 않기만을 생각했지 어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환자인 남편이 담대해졌고, 저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다 내려놓은 후에 보여지는 구원의 감격이었습니다.
‘그렇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있었구나!’하는 자각이었습니다.
놀라운 은혜이고 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를 허락하신 의미였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가정 예배를 드리며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육신의 부모가 이렇게 유한하며 너희 개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며,
헤어지더라도 만날 소망 중에 구원을 누리며 살 것인가를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김집사는 건강해졌고, 하루하루 일상에 감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사는 회복되어진 것에만 그치지 않고 있음을 알아갑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다는 감사의 지경을
열어주셨습니다.
지금도 물론 다 되었다 함이 없고, 우리 힘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고백하며,
우리 삶을 만져가시는 주님의 놀라운 손길을 감사로 찬양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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